너의 이름을 부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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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름을 부르고싶다.

한국에 올 때마다 여러 분야에서 빠르게 변한 모습에 놀라곤 한다. 어느 새 높이 솟아 올라 간 새 빌딩들 뿐 아니라 새로운 단어들, 짧게 줄인 말들은 따라잡기 힘들 정도이다. 

90년 대 초까지는 패션 스타일도 요즘에 비해 훨씬 더 획일적이어서 여름 철에 한번씩 귀국 할 때마다 모든 여성들의 입술 색깔이 똑 같이 달라져 있기도 했는데 어느 해엔 시내에서 보이는 모든 여자들이 다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있어서 흠칫 “무셔버…;; “ 했던 기억도 있다. ㅎㅎ

요즘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 한 가지는 “호칭”의 문제다. 오래 전엔 가게나 식당등의 종업원에게 “언니!” 라고 불렀는데 언제부턴가 “이모!”라고 하길래 처음엔 정말 친척인 줄 알았다. 그 뒤로 호칭마다 “..님” 을 붙여 부르다가 요즘엔 만나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선생님” 이라고 부르는 것을 자주 본다. 여러가지 호칭 중에 이 “선생님” 만큼은 적응하기가 정말 어렵다. 내 사랑하고 존경하던 선생님들의 모습과 교차되면서 “ 왜 당신이 나의 선생님…?” 이런 생각이 들어 불편해서 도저히 사용할 수가 없다. 모두에게 그냥 이름 하나면 통하는 나라에 거주해 온 지 35년이 넘어가다보니 그저 이름 하나로 부르고 싶고 그렇게 불려지는 것이 편할 뿐이다. 타이틀에 연연하게 만드는 허례를 누가 이렇게 새로운 단어들을 만들어 가며 계속 부추기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고유한 문화상 서로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는 어렵다고 해도 서로 적당히 존중해주는 정도에서 종사직종 뒤에 “님” 자 정도를 붙이는 것으로 계속 사용했다면 좋았을 것 같기도 하다.


어머니 집에 와서 일 해 주시는 분에게 “아줌마” 라고 부르다가 어느 날부터 이름을 불러드리기 시작했다. “효선씨”가 된 아줌마는 그 날부터 내 친한 친구가 되었다. 함께 시장에 가거나 엄마의 심부름 을 갈 때마다 나는 효선씨를 내가 좋아하는 카페로 데려가서 커피와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곤 했다. 그녀가 나와 동갑이고 영어 공부를 매일같이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내가 기거하는 어머니 집의 이층 청소를 해주는 대신 내 안락의자에 앉아 내가 보는 영어로 된 영화나 뉴스를 보게 하고 나는 그녀의 옆에서 걸레질을 하곤 하는데 그녀의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나를 더욱 행복하게 해 준다. 그녀는 생활 속의 지혜가 많아서 많은 것을 내게 가르쳐주고 또 얼마 전에는 그녀의 고향 시골 밭에서 캐 온 야채들을 내 작은 베란다에 심어 내가 원하던 작은 온실같은 공간을 함께 만들기도 했다. 아줌마가 효선씨가 된 이후 적막한 시간에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나를 보면서 좋은 친구를 얻은 것에 행복감을 느낀다. 

 우리 모두가 그냥 타이틀 없는 이름으로 만났으면 좋겠다. 연주회 때에도 장황하고 위화감드는 프로필 대신 “오늘의 연주가 제 프로필입니다” 라고 쓰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


요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무례하지 않고 상대방을 최대로 높여 드리는 호칭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있는 나를 보게된다. 동시에 효선씨가 그냥 아줌마로 남아있었다면 우리의 사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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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주회란

바로크 음악에서 콘티누오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음악의 흐름을 이해하고 그 뉘앙스를 이끌어 내어주어야 하는 콘티누오는 마치 바닷물과도 같아서 좋은 콘티누오는 멜로디 파트가 마음 껏 그 깊은 물에서 헤엄을 치는 것과 같은 자유로움을 갖게 해준다. (반대의 경우는 접싯물에서 헤엄치기 내지는 헤엄치는 발목 밑으로 끌어당기기의 역할을 하게 됨)

쿠이켄 선생님은 연주 때마다 콘티누오 파트를 향해 “너희가 리더, 너희가 솔리스트..!!”라며 기염을 토하시곤한다. 그래서 나는 콘티누오 파트가 있는 연주를 내 독주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무반주 연주회만이 독주회라고 생각한다.



말하는 음악

가사의 발음 그대로 활로 표현하는 것.

속도와 길이가 아닌 활의 농도로 말하기.

내음정 네음정 따지지 말고 다 하모니 속에서 만날것.

쿠이켄 선생님과의 마태수난곡은 할 때마다

날마다 새로운 영원한 첫사랑

같은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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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샤콘느 음반 녹음 중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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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영화는 그 느낌이 사라질까 두려워 두번 다시 보기싫어하는데 음반녹음도 혼을 다해 연주한 뒤엔 다시듣고 에디팅하는 게 정말 힘들다. 그래도.. 샤콘느는 아닌 것같아서 다시 한번 정리해서 녹음 스튜디오로 향했다. 토요일..오후네시..광화문..데모대..이런 강적군대를 만나 갈길을 못가고 뱅뱅도는 택시 안에서 현기증이 밀려왔다. 겨우 내려서 아인슈페너 한잔하고 연주 시작하려고 좋아하는 카페에 들렀다. 유난히 친절하게 맞아주던 바리스타께서 관대한 양의 럼을 쏟아부으셨는지 한모금 마시고 깜짝 놀라 두모금째 멈췄는데도 취기가 돌았다. 맥주 한모금에도 빙 도는 체질인데... 맙소사,녹음하는데 계속 헤롱헤롱...의식의 70%만 작동하는 것같고 음악은 느끼겠는데 눈과 손은 더디게 느껴진다... 평생 처음 이거 연주도 아닌 녹음현장에서... 몇시간을 헤맸다... !자정을 넘기고서야 겨우 마치고 택시에 기어오르니 완벽한 음량으로 내가 좋아하는 조합의 기타와 목소리... 이 노래가 흐른다. 오...주님 감사합니다!...그런데 저 오늘 두번이나 큰 죄를 지었어요. 한번은 녹음하던 중에 그냥..나 이거한 담에 바욜린 그만 둘거야! 그랬구요...또 한번은 나는 바이올린을 하지말아야 돼..그랬어요...한참 녹음하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제 목소리를 듣던 엔지니어가 얼마나 황당했을까요...ㅠ 그래도 주님...구두장이 요정처럼 밤새 그 기계속에 들어가셔서 제 틀린 음들 좀 다 고쳐주시고 요로케조로케 멋지게 좀 만들어주세요... 그러실 수있자나요... 엉엉...이러면서 이 감미로운 기타소리에 흐르는 노래를 듣다가 갑자기 드는 생각이.. 바흐는 아마 이 샤콘느를 기타나 루트를 위해 썼을거야.. 그 훌륭한 분이 이렇게 무자비했을 리가 없지.. 아마 분명히 그랬을거야... 기타나 루트... 그거야그거. 나는 기타랑 루트가 좋아... 코드는 그렇게 소리나야 젤 멋지지... 기타..루.... 쿨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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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연주 후

마지막 연주를 마치고 도쿄에 돌아오니 아마추어 리코더 연주자 아시노씨 댁에 마련된 음악실 Space 415에서 파티가 열려있었다. Farewell party 라고 하면 너무 쓸쓸하다고 떠나기 전날이나 Jin Kim Welcome party 라고 했다. 아시노상이 한국에서 무지카글로리피카 연주 후에 연주자들과 아마추어 팬들이 함께 연주하며 즐기던 것을 보고 너무 좋아 그렇게 마련한 시간이라고 하셨다. 철학가인 아마추어 감바연주자, 콘서바토리에 다니는 첼로. 오보에, 풀룻 주자들과 한국에서도 연주 했던 리코더 연주자 모토무라씨, 대학에서 모던 바이올린을 가르치고 있는 여교수와 요즘 혜성처럼 나타나 일본의 뱅자맹이라고 불리우는 천재 쳄발로주자 가쿠군도 와서 아시노씨가 60년대부터 모아두셨다는 별별 악보들을 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솔로 두오 트리오 콸텟 퀸텟 콘첼토등을 함께 연주하며 자정까지 놀았다.

가슴 뭉클하게 즐겼다.

아마추어, 프로페셔널, 학생,교수 할것없이 이렇게 함께 연주하며 얼마나 음악을 즐거워하며 얼마나 행복했는지...

우리나라에 이런 만남들이 연중 일어날 수있는 공간을 갖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바흐의 음악을 중심으로 가사를 쓰는 작업으로 작품(아래 사진들)을 만들어 독일에서 수십년간 전시를 해오고 있는 아시노씨의 부인은 오래 전 우리 무지카글로리피카의 로고도 써주셨었는데 언젠가 내 연주 때 한국에서 함께 전시하고 싶다고 하셨다. 십년 이십년 이상 알던 사람들과 처음 만난 사람들... 모두 음악 안에서 가족처럼 나누는 시간이 벌써 그리워진다. 거의 매일 비가 와서 너무 힘들었는데 오늘은 완전 쾌청. 아름다운 날이다.

See you again!

연주 후의 이야기 2편

9월 연주가 벌써 한 달도 더 지난 추억이 되었다.

연주가 끝난 후에 자신의 음악을 듣고, 연주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연주 다닐 때마다 사진도 별로 찍지않고, 녹음도 꺼리던 내가

우리 카페를 위한 음원, 영상자료를 구해 드리면서 듣고보는 가운데 많은 것을 깨닫게된다.

작년에 쿠이켄 선생님이 이년에 걸친 스케줄을 주시면서 한국연주를 기쁘게 맞아주셨을 때,

올해는 오케스트라 규모이던지 아니면 셋이서 하는 연주회로 하자고 하셨는데,

오케스트라 규모의 연주가 여러가지로 너무 부담이 커서 셋이서 하게 되었다.

벤자민의 스케줄은 애초부터 연주 전날 밤 늦게 도착하는 것이었지만,

"젊으니까 괜찮을거야..." 라고 하셨다.

만약 비행기가 연착한다거나... 리허설 시간도 없이 너무한데....

생각은 했지만, 말씀을 드릴 수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편안하게 말씀을 하셔서

그냥 벤자민의 '젊음'에 의지하기로 했다...

업데이트 된 프로필이 너무 늦게 올라가긴 했었지만

애초부터 한국 연주자 김윤경씨와 한 곡이라도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을 때

선생님께서 흔쾌히 좋다고 하셔서 우리 넷이서 이번 연주의 팀이 되었다.

스위스에서 리사이틀을 한 후, 어찌어찌 연결 편을 타고

벤자민은 연주 전날이 아닌 연주 날 오전 1시경 호텔에 도착했다.

연주 당일 오후 1시부터의 스케줄이란...

1시에 쳄발로 연주장에 입장.

벤자민이 악기상태 점검, 조율.

거의 세시가 다되어 리허설에 들어갔다.

중간 중간 음향 체크, 위치 조절,

저녁 식사도 간단히 대기실에서 하고...

아직 더울 것같아서 미국에서 하나 들고 온 윗도리에 맞는 긴 치마가 없었다.

아는 분이 급히 만들어 연주회장으로 가져다 주셨는데, 그 윗도리와 치마사이가 붕 뜨는 것이었다...

너무 마른 사람이 통통해 보이기 위해 디자인 한 것같은 ,

내가 가야하는 방향과 정 반대의 현상이 되어버린 상태에서...

궁여지책으로 가지고 있던 까만 긴 줄 목걸이를 치마 허리에 달아야겠다고 생각.

연주 직전에 시간 내어 하고 있던 작업은 바느질이었다...

너무 비대해 보이지 않도록... 시선을 분산시켜야겠다고....

목걸이를 바늘로 찔러 쑤셔 바느질을 하면서.... 참 스스로 한심했다.

작년 독주회에 입었던 자줏빛 투피스는 각각 다른 매장의 아울렛에서 구입한 캐주얼 의복에

전에 다른 옷에 붙어있던 까만 레이스를 주렁주렁 꿰메어 달아 입었는데...

왜 옷하나 해결을 제대로 못할까...생각도 들면서....

그렇다고 현란한 드레스는 딱 질색이라... 비싼 옷을 맞추어 입는 것 또한 체질에 맞지않고...

그런대로 하다보니 또 재미가 있었다.

연주는 정말 많이 즐겼다...

그리고 스스로의 연주에 대해서도 또 다른 깨달음이 있었다.

음악과 나사이,그리고 관객과 나 사이에서 얻은 깨달음은 다음 연주를 위한 활력소가 될 것이다.

벤자민과 시기스발드 선생님의 바위처럼 견고하고, 살처럼 편안한 그 자연스러움...

윤경씨의 이지적인... 쟁이님의 작품인 악기가 또한 내 악기와 너무 음색이 잘 어울려서 정말 좋았다.

그리고 이번 연주기간을 돌아보며 또 다른 추억과 교훈이 된 두가지 에피소드를 풀어본다...

첫째, 연주 전 일주일 동안에는 딱지놀이를 하지말것.

이번에 처음으로 화려하게 변신된 딱지를 보게되었다.

엣날에 가지고 놀던 딱지는 종이를 접어서 통통하게 만들어 푹신푹신한게

때리면 뒤집어지기 쉬운 그런 정다운 딱지였는데...

색색으로 그림도 현란하게 변신해버린 작은 딱지들을 보고 아들 애반이랑 같이 여러개를 사서 놀았다.

정말 어려운 놀이가 되어버린 딱지...

뒤집힌 상태의 딱지를 뒤집은 딱지로 모서리를 때려야 잘 뒤집힌다는 사실을 알게되기까지,

처음에 심심풀이로 시작했던 딱지치기 놀이는 급기야 온 힘을 다해 사정없이 내리치며

둘 다 흥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경지에까지 가게되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치다보니 오른 팔을 올리기가 거북할 정도로 팔이 아팠다.

그 후 이틀 정도 연습에 무리가 갈 정도였다...

그래서 딱지놀이는 연주 직전에는 절대로 하지말아야 한다는 것.

일 주일 이전에 하더라도 될 수있으면 왼손으로 칠 것.

활이 부들부들 떨리면 할 말 다 한 것아닌가...

둘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릴 때는 꼭 층수를 다시 한번 확인할 것.

7살때부터 가장 친한 친구의 생일이었다.

소꼽장난 시절부터, 사춘기 소녀시절을 지나 강산이 몇번 변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점 변함없이 제일 친한 내 친구.

다정하기 그지없고, 서로 너무 다른 게 또한 그지 없는,

나보다 더 나를 위해 눈물 많이 흘려주는 친구.

그 친구 생일에 너무나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은데, 도무지 마땅하게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무엇을 사도 다 부족할 것같았다.

그래서 결국 생각한 것이...

예쁜 작은 부케와 예쁜 작은 케익과,

그리고 바이올린을 어깨에 짊어지고 아침일찍 그 친구 집으로 출동.

내 생각에 스스로 흥분해서 택시에서 내리자 케익상자와 부케를 들고 바이올린을 메고 가방은 등에 짊어지고

부랴부랴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향해 들어갔다.

막 문이 닫히려는데 모자를 멋지게 쓰신 할아버지 한분이 뒤따라 들어오신다.

육감적으로 친구가 말한 적이 있는, 바로 옆집 그 할아버지 일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날이면 날마다 오페라를 틀어놓고 들으신다는...

몇층으로 가세요? 하니 아니나 다를까 3층이라고 하셨다.

아, 네.. 저도 3층에 가는데요...

저... 복도가 조금 시끄러우시더라도 잠깐 양해해 주세요...

지은이 엄마 생일이라서요... 축하 좀 해주려고 하는데요... 좀 놀라게 해주려고요...

그러자마자 엘리베이터가 멈추어 바로 나가서 허둥지둥, 누가 볼새라,

꽃을 앞에 놓고 그 옆에 케익을 놓고, 땅바닥에 바이올린 케이스를 놓고 막 열려는 순간...

" 여기는 4층인데요..." 할아버지가 말씀을 하셨다.

아니 평소에 맨날 4층에 내려서 한층 걸어 내려가던 것을 수백번 했을터인데,

그 날 남의 집 앞에서 식전 아침부터 고성방가한다고...

신나게 해피버스데이...어쩌고저쩌고 연주하고 있는데,

모르는 사람이 문을 쓰윽 열고, " 아니...누구세요? 이게 왠 시끄러운..."

이랬을 것을 생각하자 등이 오싹했다...!

이런 것을 두고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하는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 할아버지가 그날, 그시간, 나와 함께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린 그 운명.

나는 정말 감개무량할 정도로 감사해하며 다시 다 싸들고 할아버지 뒤를 부리나케 쫓아 내려갔다.

할아버지가 씨익 웃으며 " 해브 어 굿 파티" 하시며 옆집으로 들어가셨다.

휴우... 한 숨 들이쉬고,

내 바이올린 꺼내서 닫혀진 문 앞에서 해피버스데이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조금 지나서 문이 열리며, 내 친구... 그 예쁜 얼굴이 나오며...

눈이 휘둥그레지다가, 남편과 딸이 뒤따라 나오며 소리를 지르고, 카메라를 들이대고...

변주곡까지 다 마치고 나서보니 친구는 울고있고...

가족은 와아.. 이렇게 로멘틱한 생일은 처음이야...하며 즐거워했다.

나는 내 친구 볼에 뽀뽀를 해주며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그토록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친구의 존재가 너무나도 고마워서 눈믈이 났다...

가위 바위 보 놀이에서부터, 소꼽장난 시절부터, 사춘기 소녀시절, 여대생 시절에도

매일같이 만나도 헤어지길 싫어했고, 서로 너때문에 연애도 못해봤다고 핀잔을 주고받는 친구이다.

서로 다른 학교,다른 과이라서 나는 그 친구의 국문학 강의를, 그 친구는 내 음악사 시간을 끼어앉아 듣기도 했었다.

한 번도 빠짐없이 내 연주에 와서 축하해주지만, 지금도 뭐가뭔지 모르겠다... 한다.

나의 음악적 지상목표는 언젠가 이 친구를 나의 음악으로 감동시키는 그것일 것이다.

그 날을 향해 매진 할 것이다.

지금도 일곱 살 그 때처럼 장난스럽게 놀고,

서로 너무 달라서 이해 할 수없던 것들도 진심으로 인정해 주게 되기까지 참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냥 만나서 앉아만 있어도 다 위로받게되는 그 친구를 위한 복도에서의 깜짝연주...

사랑의 연주...

이런 마음의 선물로 드리는 그런 연주를 늘 하고싶다.

이번 연주회는 시기스발드 선생님의 희생적인 사랑,

벤자민의 초인적인 스케줄,

윤경씨의 정성이 가득한 연주와

기획사의 희생적인 노고가 함께한 가운데

이 모두를 조화롭게 울려퍼지게 한 여러분의 따뜻한 마음이

우리모두를 많이 행복하게했던

참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2011.10.16 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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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 후의 이야기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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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간의 시골길에서

입술을 깨물며 주님께 말했습니다.

"하나님,그래도 주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저 사람은 저렇게

잘 둘러진 장막안에서 재미롭게 즐기는 모양들이 부러웠습니다.

세련된 매너 속에서 흘러나오는 인본주의가 따뜻해 보였습니다.

누가 이 길을 쉽고 즐거운 길이라고 할 수있을까요?

쉽게 따라갈 수있는 길은

예쁘게 화장된 얼굴처럼 매력있어 보였습니다.

바로 오늘 밤

그 입술을, 그 눈가를 깨끗이 지웠을 때

그 모습은 정녕 드러날 것입니다.

영원과 합해진 삶, 영원과 연결되는 작은 선택들...

자꾸 재촉해 마지않는 요동하는 저에게는

실보푸라기만한 무게도 힘겹게 느껴지곤 합니다.

딱 한가지, 나를 위해 죽을 수 있으셨던 그 마음을 기억하면

알 수없는 수 많은 의문들을 가벼운 마음으로 미루어 둘 수있습니다.

지금 다 대답을 얻지 못한다해도

그 사랑에 안식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 한 쪽은 주님을 의혹하고, 다른 구석은 원망을 하고 있어도

한가닥 저 뱃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소리는

" 하나님,그래도 주님의 뜻을 선택합니다"

내가 지나왔던, 아주 친숙해보이는 골목 모퉁이의 찻집에서 흐르는

옛노래를 들으며 저는 어두운 시간들을 그리워했읍니다.

그러나,그러나

하나님은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늘나라를 더욱 그리워하라" 하십니다.

오래 전,

일년 중 삼백일 정도를 멜빵달린 청바지만 입고 다니던 시절에 썼던 시 한편입니다.

연주 여행이 없을 때에는 시골의 좁고 구불구불한 길들을 탐험하며 자연과 책, 이것만 있으면 하루가 기뻤습니다.

수백번도 더 찾았을 미시간의 시골길에는 노을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길, 반딧불이 휘황하게 넘실대는 숲속 구석길,

개구리들이 가장 시끄럽게 울어대는 길등...

눈을 감아도 구석구석이 보일 정도로 익숙해진 길들이 항상 정답기 그지없었습니다.

눈이 오면 눈이 오는대로, 낙엽이 지면 낙엽이 지는대로,

아니 일년 중 모든 날이 다 저마다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가지고

나를 반겨주었던, 그곳이 저의 마음의 고향, 미시간의 시골길입니다.

연주여행이 없으면 대낮에 일어나 어슬렁 거리는 제게 친구가 되어 준 사람들은 은퇴해서 놀고있는 흑인 아줌마들,

혹은 갈 곳없는 미혼모등... 외로운 사람들과 가장 따뜻하고 다정한 시간들을 보냈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연주들을 할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이 곳을 떠나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 시골길,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주는 자유함이 아직도 외롭지 않았던 것,

극도로 적막한 시간들 속에서 잠잠히 느끼던 기쁨들 때문이었습니다.

외국에 다녀오면 시간이 적응되기까지 다 잠든 한 밤중에 차를 몰고 또 시골길로 달려갑니다.

적막한 길 한 가운데서 헤드라이트를 꺼버리고 운전해 봅니다...

돌아오는 시내에 자동차가 한 대도 없는 시간에는 차선을 거꾸로 가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새벽 다섯시가 되면 동네에 오래된 아이스크림 가게가 문을 엽니다.

아침 잠 없는 할아버지들이 동트기 전부터 나와서 커피와 도넛을 시켜 먹고 계시고...

나는 가장 좋아하는 스위스초콜렛알몬드 아이스크림을 시킵니다....

다시 나를 힐끔 쳐다보고 아이스크림을 담아주는 아이에게... 지금 저녁 간식시간이야...하고 말합니다.

그 자유... 그 외로움... 참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했습니다.

1980년대 한국을 떠났을 때, 아니 유학길에 올랐을 때는 정치의 수준을 넘지 못하는 교육의 수준에 대한 엄청난 회의,

그리고 그 교육의 너무나 많은 제약 속에서 타는 갈증을 해소해주지 못하던 예술 교육등에 대한 환멸에 지쳐있던 터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1990년대,시기스발드 선생님 가족과 한국을 구석구석 여행 하던 때마다 선생님은 내 눈을 좀 더 크게 뜨게 해주시곤 했습니다.

한국의 시골, 재래시장, 옛 건물, 옹기종기 모여 땅바닥에 펼쳐 놓고 밥을 먹는 시골 사람들,

그들이 선듯 건네 주며 함께 먹자던 그 마음을 너무나도 기뻐하시는 모습들을 보면서도,

나는 아직도 왜 미국에서 지내는가를 애써 설명하려했고,

선생님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가 왜 이렇게도 좋은가를 많이도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서로 양보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무섭게 질주하는 택시 안에서 내가 민망해하면,

남부 이태리 같아서 좋다시며, 제일 견딜 수없는 것은 너무나 조용하게 정리된 큰 도시라고 하셨습니다.

브뤼셀 근교의 선생님 댁 바로 옆에 작은 아파트를 물색해서 데려가 주시기까지 했던 말린 쿠이켄도

왜 내가 끝까지 유럽으로 이사를 오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어했습니다.

그 때 나에게는 미시간의 시골, 너무도 적막한 외로움의 댓가로밖에는 살 수없었던 자유가 너무나도 소중했습니다.

이번연주 후에 제가 시기스발드 선생님께 말했습니다.

처음으로 한국을 떠나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good!!"하고 크게 외치셨습니다.

선생님이라면 왜 미국에서 살지 않으실 것인지 오래 전부터 익히 들어 알고있습니다만...

영국에서 미국으로, 그리고 유럽에까지 파고 들어오고있는 상업주의...

콘서바토리들에까지 물들고 있는 예술의 상업주의,

그 데카당스가 주는 환멸,

그러나 그 종말이 가져 오고야 말, 오히려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와 희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생명의 끝과 영원에 대한 얘기도 많이 나누었습니다.

죽음이 영원에 이르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에 대해,

그리고 선생님이 느끼시는, 다 타버린 재에 대하여.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재의 생명력에 대해서.

우리 생명의 끝인 한 줌의 재,

이 우주에서 없어지지 않을 오직 하나의 물질이 될 우리의 생명입니다.

나는 이번 연주에서 또 한번 내가 얼마나 많은 필요없는 것을 짊어지고 있는 소리를 내고 있는지에 대하여,

그리고 선생님 옆에서 듣기만 해도 얼마나 많이 깨닫게 되는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많은 말이 필요없이, 선생님은 사랑과 격려를 온 몸으로, 그 행동으로 보여주시고 가셨습니다.

오늘,

잠깐이나 강한 만남을 늘 주시는 시기스발드 선생님과의 시간을 다시 기억하며.

한국의 관객들, 음악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깊이 전해드리고 싶은 그 분의 영감,사랑에 대해 생각합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우리에게 이런 시간들이 주어지게 될지...

유럽에서 연주 할때에도 가끔 동료들과 얘기하곤 합니다.

어쩌면 수십년의 시간이 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항상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그토록 참된 마음을 만질 수있는 예술 혼을 자주 보지 못하는데서 오는

제 자신의 기우입니다.

그 선생님의 사랑 안에 여러분들이 있습니다.

2011.10.04 김진

현재진행형인 우리들...

무더운 여름밤입니다.

그곳도, 이곳도...

여기 저기 이상 기온도 많고,

재난도 많은 시간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득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너무나 많은 아픈 사람들...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무사히 하루를 마친것이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일 때가 있습니다.

왜 나는...?

고개가 갸우뚱거려질 때가 있습니다.

에디팅이 끝난 CD라 해도 자신의 연주는 낯이 뜨거워 들을 수가 없는데...

오늘, 이 뜨거운 여름 밤에...

몸과 마음이 피곤한 시간에,

에디팅을 하고있는 중인 이 곡을 들으면서,

어쩐지 조금 더 가난한 마음이 되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의 연주에서 조금 멀리 서서...

이 곡이 말해주는 소리를 들으면서....

내 자신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게 느끼게 해주는 이 음악.

어떤 슬픔이라도,

어떤 분노라도,

별과 별들 사이에서 흘러나오고 있을...

영원히 맑은 물같은 화음의 빛으로라면

아주, 너무나 가볍게 껴안을 수있다고,

말해주는 것같은 이 음악을 들으면서...

너무나 광활한 이 세상,

또는 우주...

내가 너무 작은 것이 오히려 감사하고,

하루하루 끝없이 변해가고있는 나를 무엇이라 정의하기를 그만두기.

현재진행중인 이 음악처럼,

우리도 현재진행형인 모습이라는 것을

스스로 감싸주기.

영원히 현재진행형일 수있다는 것에 큰 희망을 갖기.

잠시

시간과 공간,

내 자신도

문제가 되지 않게 해준

이 음악에

감사하며...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을

희망으로 승화시켜주는

이 음악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2011.7.22 김진

고음악 단상 (1)

요즘 우리나라에 갑자기 고음악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오는가보다...

시카고 근교의 어느 작은 한인상가에서조차 한국판 고음악 관련서적을 보게되었으니...

반가운 마음에 얼른 사게되었다.

여기저기서 잠깐씩 접해 볼 때마다 갸우뚱...하게 만들던 내용이 여기 또 상세히 적혀있기에 한번 써본다.

연주자들의 작품해석 방식을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볼 수있다고 한 내용이다.

" 한가지 방식은 과거에 그 음악이 어떻게 연주되었는지에 대해 구애받지 않고 현재 사용가능한 악기와 현대의 감각이나 정서에 맞게 연주하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 방식은 과거 그 음악이 연주되었던 상황이나 현실을 가능한 한 그대로 복원하여 당시 작곡가가 의도했던 소리에 가장 가깝게 연주하는 것이다. 전자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만약 과거의 작곡가들, 예를 들어 바흐가 오늘날 우리와 같은 음악환경에 살았다면 하프시코드와 내추럴 트럼펫 같은 악기를 고집하지 않고 주저없이 현재의 기술이나 전자장치를 활용한 악기를 선택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럴까...?

'바하가 오늘 날 살았다면....' 많이 듣는 이야기다.

현대의 악기를 사용했을 것.... 혹은 현대악기로 연주되는 자신의 작품을 듣는다면 자신의 곡인지 모를 것... 등.

둘 다 맞는 말이다.

바하가 요즘 사람이라면 물론 요즘 사용되는 악기를 사용해 작품을 만들었을것이다.

그가 살았던 그 때도 다양한 악기들의 속성을 깊이도 이해하고, 최상의 수준의 음악을 악기들로부터 끌어낼 수있었던 그이기에

전자악기, 그랜드 피아노... 인들 무슨 제약이 있으랴...?

한 가지 확신할 수있는 것은 만약 바흐가 요즘 악기를 사용해서 작곡을 한다면

요즘 악기들의 특성에 가장 알맞는 곡들을 썼을 것이라는 점이다.

한마디로 다른 음악이 나왔을 것이라는 것이다.

32분음표 8개씩을 묶은 슬러들을 메사데보체가 되는 가벼운 활로 연주했을 때의 특별한 효과를 그리며 작곡했던 아다지오 ( solo violin sonata g minor 중 ) 를 훨씬 무겁고 메사데보체가 되지 않는 활을 사용하여 작곡한다면 같은 효과를 생각하며 곡을 썼을 리 없다.

같은 음을 반복할 때의 연주법이 옥타브 떨어진 음들처럼 짧게 끊어져 소리내는 아티큘레이션이 통례였던 당시에 작곡된

prelude ( solo violin partita E major 중) 에서 E,A선을 짧게 오가며 반복되는 E 음은 요즘의 악기와 주법으로 연주하면 부드럽게 지속되는 긴 E음으로 들리므로 아주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게 되는것이다.

바하가 그 당시에 만들었던 그 작품들은 그 당시의 음악환경과 악기들의 특성이 결합되어 나온 산물이다.

식초가 고추장을 만나면 초고추장이 되어나오듯이.

식초와, 예를 들어 케첩등을 가정하면서 왜 초고추장에 대한 논리들을 펼치고자 하는지 모르겠다.

아, 여름이라 회덮밥이 생각난 것같다...

이런 저런 것들 안 따지고, 그냥 내가 좋아하는 악기소리에 젖어 연습 할 수있으니 정말 행복하다...

2011. 6. 10 김진

LPB 와 Mozart 연주회

항상 아늑한 도시 Leuven

항상 아늑한 도시 Leuven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며칠 전 유럽에서 연주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La Petite bande와 Mozart 곡들을 연주했어요...

Symphony 39번과 41번,피아노 협주곡 26번(KV 537)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Mozart 곡은 눈꼽만큼의 실수도 어마어마하게 들어나버리는 음악의 특징이 있지만,

그렇다고해서 심각한 모습으로 완벽을 위해 안간힘 쓰며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도 우스워져버리는 음악인 것같습니다.

활도 낭비함없이, 시기스발드 선생님의말씀처럼, " less is more..." 꼭 필요한만큼 써야 어울리는 소리가되고,

박자도 어찌보면 과장될 여지가 없이, 선생님 말씀처럼," silence of time..." 을 생각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포르테피아노 협연에 Luc Devos

포르테피아노 협연에 Luc Devos

교향곡 41번에서는 자칫 정열에 빠져 허우적대는,그래서 끝나기도 전에 다 지쳐버리는 듯한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시기스발드 선생님께서 그 때마다 적절히 조절시켜주시는 말씀.

"use more brain..."

가슴을 차게 하라는 게 아니라, balance를 맞추어야한다는 지적이셨습니다.

비오고 어두운 날씨가 계속되어 호텔방에 봄냄새를 좀 사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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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가장 좋아하는 보라색 히야신스입니다.

며칠 간 눅눅한 방을 가득 채웠던 봄냄새였습니다...

2월 14일이 가까워오자 온 시내가 꽃과 하트모양 장식으로 가득차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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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씩 휴식시간이 되면 작은 도시를 빠른 걸음으로 산책을 하고 또 맛있는 음식을 찾아 한숨을 돌리곤합니다.

마크와 함께 먹었던 디저트의 귀여운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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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리허설하고 연주하고...

운동량이 적어서 몸무게가 잠깐 사이에 많이 늘어버릴 수있는 시기가 바로 이때입니다.

그래도 얼마나 음악 안에서 즐거웠는지요...

연주때에도 Mozart 음악이 주는 경이와 즐거움에 미소가 절로 나왔습니다.

물흐르듯 곡을 만들었을 Mozart가, 온몸과 얼굴이 경직되어 한음도 틀리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연주하는 연주자들의 모습을 보면 "푸하하..." 하고 웃어버릴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서 자유롭게 많이 즐기려고 노력했습니다.

연주 후에 관객으로 왔던 한 연주자가 저더러" 왜 그렇게 연주 중에 많이 웃었냐"고 해서 "Mozart 곡에 너무 웃기는 부분이 많아서 그랬다.."고 했어요. 사실이 그렇지요...?

그리고 이번 연주의 가장 즐거웠던 순간의 깜짝 연주입니다.

마지막 연주날이 시기스발드 선생님의 생신이었습니다.

선생님은 39번 리허설을 시작하셨는데 우리 연주자들은 이 노래를 시작해서 놀래드린 순간.

다들 연주하는데, 저는 오로지 우리 카페회원들께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연주 안하고 뒤에서 사진기를 들고 찍고있었지요..!

마음 따뜻한 연주여정이었습니다.

앞으로 내 음악을 어떻게 만들어 나가야 할것인지 다시 많이 생각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지극히 단순한 음의 반복이 흐트러짐 없는 리듬 속에서 계속되는 순간, 영원한 아름다움을 경이롭게 느끼게 해주는 Mozart의 음악.

지금,이곳에 살고 있는 우리의 일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있다는 희망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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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나마 여러분들께 드리는 " happy valentine's day !"입니다.

2011.2.22 김진

일본연주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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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갈때마다 처음 느껴지는 감정은 "...할 말..없다..."이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리무진 버스를 타러 가는 동안에도 벌써 서너번의 꾸벅이는 인사를 받고(전혀 모르는 사람들...예를 들면 세관검사원이나 버스티켓 판매원 혹은 짐을 실어주는 리무진 버스도우미등...),나를 도와주고 싶어 안달이 나있는 것만 같은 사람들의 홍수처럼 밀려오는 친절에 어안이 벙벙한 상태의 일 주일가량이 지나면 "할 말..없다.."는 감정이 어떤 연유에서인지 이케부쿠로 한 복판에 나가 "꺄~~~악!!!" 하고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으로 바뀌어진다.

어떤 연유에서인지라기보다는 사실 몇 가지 이유가 있긴 하다.

어딜봐도 한 군데 흐트러진 곳이 없고, 먼지 하나 발견하기 어렵고,누구 하나 큰 소리로 얘기하지 않는 것 등등..."참 신기하지..."혼자 구시렁 거리면서 나도 몰래 호텔이나 식당에 가면 어디 먼지 없나...하고 면밀히 살펴보다가 커피 메이커 덮개위라든지,블라인드 커텐의 한쪽 모서리에서 덜 닦여진 먼지자국이라도 보게 될라치면 마치 오래 쫒던 범인 이라도 붙잡은 형사라도 된 양, 회심의 미소를 짓게된다.

그러면서 또 그런 식으로 되어가는 내가 한편 이상하기도 하면서... 약간 복잡한 심경이 되어가곤 한다.

아침 출근 길의 지하철을 탔다가 가슴에 매달고 있던 선글라스가 짓이겨 질정도로 사람들이 들이닥치자,"어..어! 아이쿠!!"를 연발하다 주위를 보니,다들 마치 아무렇지도않다는 듯,눈썹하나 깜박이지 않고 조용히,완벽하게 쾌적한 모습들로 짓이겨지고들 있었다.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언젠가는 신간센 열차를 타고 가는데,어떤 괴상한 차림의 남자가 열차 한 복판에 흰장갑을 끼고 서서 각 역마다 열차 안내방송이 나오기 약 10초 전에 안내방송과 정확하게 똑같은 말과 억양으로 선수쳐서 방송(?)하고 있었다...이렇게 웃길수가...나는 킥킥거리며 웃다가 거의 걷잡을 수 없이 몸을 비틀며 웃기 시작하는 단계로 넘어가다가 더 큰 충격적인 모습을 보고 웃음을 뚝 그치고 말았다.

그 객차 안의 모든 승객들 중 오직 나 혼자만 웃고 있는 게 아닌가..? 다 들 웃음을 참고 있다는 표정만 보였어도 좀 덜 충격적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마치 tea ceremony 라도 하고있는 양,약간 머리를 수그린 채 심각하고 얌전한,거의 경건한 사람들의 모습에 약간 착란적인 현상을 보이는그 흰장갑의 사나이에게서 받은 충격이상으로 나는 놀랬다.

이케부쿠로 시내 한 복판에서 고함치고 싶어지는 이유는 주로 이러한 상황들이 며칠 계속 되고 난 후의 내 심리상태를 말해 주고 있을 것이다.

1993년부터 거의 해마다 일본에 다녀오고 있었음에도, 내가 일본과 그 곳 동료들을 진심으로 마음 속에 받아들이게 되기 까지는 거의 십년이라는 세월이 족히 걸렸다.

처음 갔을 때부터, 놀랍게도 많은 고음악 연주자들과 그들의 다양한 연주들과 페스티벌등등...을 접할 때마다,마치 포르투갈에서 들여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정도로 살살녹게, 표현 할길 없이 만들어내는 그들의 카스테라나, 프랑스에서 먹어본 가장 맛있다는 크렘뷸레보다도 더 맛있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던,동경의 한 카페의 크렘뷸레를 먹게되었을 때 느꼈던 알 수없던 실망과 배반감...부러움이라고는 절대 말하고 싶지 않은 이런 야릇한 감정이 늘 내 속에 있어왔던 것 같다.

마치 내가 식당의 한 구석에서라도 먼지를 찾아보려 눈을 부릅뜨고 훔쳐보고 다녔던 것처럼, 실망하기를 기대하며 일본에 다녔던 의식의 일부가 내게 있었음을 부인할 수없다.

그들의 협동심,부지런함,친절함의 정도는 거의 현실적이지 않은 것만 같았다.

그러나,몇년 전부터인가 그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고 진심어린 언행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새삼 그 곳 사람들과 연주자들에 대한 존경심을 갖게되고,더욱 스스럼없이 친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내게 한번도 앞뒤가 다르게 말하거나 행동 하는 적이 없었다는 것,그리고 진심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깊이 생활화 되어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은 그 동안 수차례에 걸쳐 연주해 왔던 텔레만의 실내악 곡들을 모아 하나의 CD로 녹음하는 작업과 헨델의 메시야 전 곡을 연주하는 일이었다.

녹음에는 일곱 명의 연주자들이 다양한 곡들을 연주하였기에 큰 부담은 없었다.

야마나시현의 마키오카라는 작은 도시에 있는 하나카게 홀은 항상 경이감을 주는 놀라운 연주 홀 중의 하나로서 많은 연주자들이 음반 작업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 작은 시골에 이런 홀이..."이런 부러움과 놀라움이 섞인 느낌은 일본에서 종종 갖게된다.

홀 바로 앞에는 이 고장 특산품인 포도가 주렁주렁한 밭이 있고,작은 길을 건너면 유치원이 산을 마주보며 예쁘게 지어져있었다.

가끔 휴식시간에 나와서 보게되는 아이들의 놀이터,카랑하고 예쁜 목소리의 합창소리는 마음에 큰 위로를 주곤했다.

이번녹음은 프로듀서없이 연주자들이 엔지니어들과 함께 작업을 하게되어서 어떤 점에서는 시간이 많이 절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Paris Quartett No.6 마지막 악장,마지막 두어 줄에 이르러서는 나의 끈질긴 고집이 발동,수십번을 해도 끝이 나지 않았다.

나는 그 반음으로 상행하는 몇 소절과 마지막 프레이즈에서 천국으로 올라가는 듯한 느낌,그리고 시간과 공간이 완전히 초월된 영원의 느낌을 꼭 표현해보고 싶었다.

박자나 마디,심지어 강약도 중요하지 않고,평행으로 이어지는 멜로디에서 오직 영원으로 이어지는 여운을 표현하자고 하면서 하고...또 하고...듣고. 또 하고...수차례 반복하였다.

결국 끝을 내어야 했고,완전한 만족은 아니었으나 "우리모두가 같은 느낌을 추구하고자 했다..."라고들 위로하며 녹음은 끝이 났다.

밤이 캄캄하여 혼자 밖에 나와보니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직도 귀에 맴도는 그 마지막 소절이 깊은 상념과 함께 영원에 대한 말 할수 없는 동경을 불러일으키자 돌아가신 아빠생각에 한없이 눈물이 나왔다...

"삶과 죽음의 거리는 이렇게도 가깝게 느껴지는데,왜 이렇게 멀까,육체와 영혼의 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많은 그리운 사람들이 있는데,나는 이렇게 멀리 있을 수밖에 없음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리고 곧 이어진 동경에서의 메시야 연주.

오카다씨가 해마다 구성하는 오케스트라 "Musica Reservata"의 초청으로, 낯익은 많은 연주자들과 함께하여 편안하고 즐거운 리허설이었다.

단지, 별로 타협적이지 않은 보잉,최대한 노래와 어울리는 보잉으로 가길 나는 원했고, 현악기 주자들이 처음에 생소해하며 악보에 바꿔적느라 바빠했지만,연주 때는 아주 성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인상적인 것은 합창단이었다.

평균연령이 60이라는 그 합창단원들의 모습과 열심,그리고 실력...이 감동을 주었다.

한점 흐트러짐 없이 어우려졌던 메시야 전곡연주는 그들 특유의 cooperation과 concentration의 극치가 만들어 낸 아름다운 연주였다.

이번 12월3일 우리의 메시야 연주도 전곡으로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주 후,파티가 있었다.

한 번의 큰 연주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수고가 있어야하는지를 알게 해주는 시간이다.

뒤에서 수고하는 준비위원들,합창 지도자,합창 반주자,지휘자는 물론이고 연주자들 개개인이 얼마나 기쁘게 참여하고 그들의 인생이 이러한 시간에 얼마나 많은 가치를두고 열심히 준비하는가를 알게하게 하는 시간이었고,모두들 참으로 기쁘게 웃고,장기자랑도 하며 먹고 놀았다.

그 중 특별히,카운터 테너인 우에스기씨는 나를 위해 한 곡 부른다며 "아리랑"을 기가 막히게 불러주었다...참으로 인상적인 노래가 되어 가슴에 와 닿았다...

"Messiah" by Noriaki Ikeda

또 한명 특별한 사람을 만났다.

이번 메시야 연주회 포스터를 디자인 했던 이케다씨였다.

그림도 참으로 인상적이었지만 그의 인생도 인상적이다...

공학도로 졸업 후 큰 선박회사에서 13년을 일해오던 어느 날,서서히 시력을 잃게 된다는 불치의 병을 판정받고는 시력이 있는 동안 보이는 것들을 그리겠다고 결심하고 그림을 그리기시작했다고 한다.

이번 연주의 합창단원이기도 한 그는 내 헨델 CD와 그의 작품을 서로 주고받기로 하고 여러점의 그림을 선물로 주었다.

그는 내 헨델 연주에 "affection,sadness,humor,feeling of violation,will power..."등등의 감정이 있음을 깊이 느낀다며 자신의 한 그림에서 표현 한 여러가지 컬러와 느낌이 흡사하다고 했다.그의 고뇌의 골짜기에서 그려졌을 이 그림이 언뜻 보기엔 순진하고 예쁜 듯하지만, 볼수록 절망에서 나오는 희망과 치유의 흔적을 느낄 수가 있다. 이번 11월에 나오게 될 내 헨델 바이올린 소나타 한국판 CD의 커버로 넣을 계획이다.

항상 여행의 끝은 분주하다.

어쩐지 시간이 부족한 것같고, 못 다한 일들이 남은 것같아 아쉬워지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랬다.

비가 많이 오는 동경시내를 빠져나오며 다시 곧 오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네다 공항까지 바래다 주신 아마추어 리코더 연주자 아시노씨,바쁜 일정에 잠깐이라도 보자며 와서 밤과자 한 꾸러미를 주고 간 FM 라디오 진행자 노모또씨(그 밤과자를 먹어보니,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밤과자라니...다음에 가면 꼭 찾아서 사올 계획으로 봉지를 보관해 두었다!),그리고 여느 때처럼 웃는 얼굴로 시종일관 기분좋게 연습하고 함께 연주 한 쳄발리스트 오카다씨.

바쁜 와중에도 좋은 커피 맛보기 위해 찾아다니길 주저하지 않았던 몇 번의 소중한 순간들이 또한 즐겁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meditation" by Noriaki Ikeda

http://www.geocities.jp/art_ikeda_noriaki/

2009.11.1. 김진

어디까지가 고음악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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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연주를 며칠 앞두고 바야흐로 바빠지기 직전입니다.

내일부터 연주자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하고,많은 연습분량에 밀린 얘기들까지...하루 24시간이 부족하겠지요.

 

그래서 오늘,이 글을 꼭 쓰고 자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몇분의 바로크 바이올린 연주에 대한 질문들에 대해 얘길 나누어 보겠습니다.

제가 똑같은 질문을 가지고 수년을 고민했었고,오랜 시간 찾아다니기도 했었기 때문에 그 얘기도 곁들여 적어보겠습니다.

 

1987년 미시간 대학 다닐때 바로크 앙상블 과목을 가르치던 쳄발로 교수님이 유난히 관심을 보이며 덤벼들던(?) 제게 바로크 활을 주시며 일년가량 사용해보게 했습니다. 물론 모던 바이올린에 활만 바로크 활이었읍니다.

점점 그 매력에 빠져들던 제게 어느 날,가장 대조적인 스타일의 연주자들이 연주한 LP 음반 두개를 추천해 주셨습니다.

괴벨과 쿠이켄의 음반들이었읍니다.

그날 저는 "왜 이런 악기소리를 이제야 듣게 되었을까...?" 통탄해 마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후 4년간 모던과 바로크 두 악기를 함께 연주해 오다가, 바로크 바이올린 연주의 발전에 모던바이올린 연주가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 미련없이 모던 바이올린 연주를 접고, 그에 따라 보장되었던 직업 또한 포기했습니다.

 

단 한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는, 그리고 지금까지도 점점 더 좋아지는 그 결정이었습니다.

바로크 식으로,고음악에 알맞는 정격연주를 추구하고자 결단한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 악기소리와 그 활의 움직임이 너무나도 좋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 때문이었지요.

 

그 이후,음반이 나온 거의 대부분의 바로크 바이올린 연주자들에게 렛슨을 받아볼 기회들이 있었습니다.

한번 유럽에 가면 이곳 저곳으로 12시간씩 기차를 타고 오가기도하면서 연주자들을 찾아 다니기도 했던...정말 아무 생각 없이 너무 배우고 싶은 갈증에 열정적이었던 시간들이었읍니다.

 

유난히 쿠이켄씨의 연주에 매료된 것은 그 분의 인격과 삶에 매료된 것이기도 했엇읍니다.

평생 바이올린을 해왔던 사람이 다시 어린아이처럼 되돌아가서 음정이 다 틀리는 도레미파...를 턱을 떼고 연습하기를 일이년 해야한다면 쉬운 결정은 아니었겠지요? 

 

그러나 인생에서 별로 서둘러야 할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읍니다.

정격이기 때문에 했던 것은 아니었구요...그 소리가 훨씬 더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었읍니다.

목이 자유롭고,운지법이 달라지니 활의 동작이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더라구요.

바이올린 통의 울림이 너무나 더 시원하게 들리고,목과 몸이 relax 되니 쓸데 없는 긴장으로 인해 많이 몸을 흔들어대며 연주할 필요도 없었읍니다.

지난 번에 쓴 글에서 라쁘띠드 방드와의 연주에서 눈물겨웠던 그 경험은 바로 이 모두가 chin off 하고 연주할 때의 그 소리에 대한 신선한 충격때문이었습니다.

 

1751년에 출판된 Francesco Geminiani 의 "The Art of playing on the Violin"에 보면 이러한 테크닉을 공부할 수있는 체계적인 연습곡들이 아주 잘 정리가 되어있읍니다.

chin off 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겐 필수 교과서이지요.

사실 chin off 를 공부하고 난 연주자들 중에 "난 두가지 다 해 보았는데 chin on 더 좋아서 이렇게 연주한다"라는 사람은 한번도 본 적이 없읍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도해 보기 전에 " 왜 꼭 그렇게 연주해야 해?" 하고 말하더군요.

제 개인적으로 chin off 소리는 화장기 없이 깨끗하게 씻은 얼굴처럼 느껴져서 좋아합니다.

 

 

"어디까지가 정격연주의 필수인가...?"

 

"자기 마음에서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을 해결하는 그 정도까지가 정격연주의 필수이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바로크악기를 사용하나 모던주법을 절충하여 연주하는 대부분의 바로크 연주자들,또 모던악기로 바로크식 주법을 곁들여 연주하는 꽤 많은 연주자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편한 악기상태로 자신이 추구하는 정도의 바로크 음악을 연주해야겠지요.

그러다보면 그 악기의 소리상태와 연주법에 대해 어떤 갈증이 나는 때가 올것이고,그 때마다 문제를 찾아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은 또한,바로크 한다라고 하기 위해 바로크 악기를 서둘러 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지요.

한가지씩 시도해보면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바로크연주자가 되기 위해 고악기를  들고 연주하지만,무언가 열심히 흉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들리는 경우도 간혹 있으니까요. 

 

제가 굳이 추천하자면,처음에는 활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활은 입의 혀처럼, 바로크식 연주라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데 있어서 그 발음을 시작하게 해주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A 415 로 조율한 거트현의 사용이 우리의 귀에 쉽게 익숙해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브릿지,테일피스,베이스 바,넥,지판..다 바꾸는 것보다  오히려 새로 만든 바로크 바이올린이 더 쌀 경우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활은 조심해서 고를 것...펜이 나쁘면 아무리 글씨체가 좋아도 잘 써지지가 않으니까요.

 

"저희가 가진 악기와 수준으로 그 심플,순수한 소리는 흉내도 못낸다..."고 하셨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같은 악기를 써도 사람에 따라 음색이 다르게 나오듯이,소리의 색깔은 그 사람의 마음이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유명한 연주자들 중에 그 소리자체에 긴장과 욕심이 꽉 차있어서 듣기에 괴로운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테크닉 면에 있어서 차이는 있을 수있겠지만,한음 한음 소리를 내는 것에 마음을 다한다면 심플하고 순수한 음색은 전문연주자가 아니어도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오히려 욕심과 경쟁에 얼룩져 있는 요즘의 많은 연주자들에 비해 더욱 순수한 음색이 나올 확률이 많을 것 같습니다...

 

장식음과 트릴에 관해 얘기하겠읍니다.

비브라토는 장식음의 역할로서,긴 음에만 효과적으로 사용되어야하지요.

활로 다 표현하고 나머지 부분을 풀어주는 정도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비브라토 없는 소리에 익숙해 지는 것이 참 중요한 과정이지요...

요즘엔 지속적인 비브라토를  듣노라면 무슨음정을 연주하는 것인지 모르겠을 때가 있어요...^^

 

이태리식의 화려한 스케일이 많은 장식음,프랑스식의 우아하고 짧은 트릴과 모던트 위주의 장식음...

사실,제가 초기 이태리 음악을 시작하면서 창의성이 너무나 결여된 자신을 통탄하던 시절이 있었읍니다.

몇마디를 가지고 나름대로의 장식음들을 만드는데 하루 이틀이 걸리기도 하구요...

처음에는 악보에 그려가며 연습을 많이 했고 자연스레 들릴 때까지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기도 했읍니다.

 

기본적으로 장식음들은 장식 없는 상태의 멜로디가 그냥 입에서 쉽게 흥얼거려지고 너무나 익숙해져서 지겨울 정도가 된 후에 

참다 못해 튀어나오는 게 가장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말하자면 장식해야겠다하고 노력한 것처럼 들리면 이미 자연스런 장식음 처럼 안 들리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저렇게 많이 시도해 봐야만 하겠지요.

자신의 성향과 기질에 잘 맞는 장식음들이 나와야 가장 자연스러운 장식이 되기때문에 똑같은 곡을 연주해도 개개인마다 다른 곡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꼭 여러가지로 시도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옳고 그른 것의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세련된 정도가 좀 다르다는 차이겠지요.

그러나 bad breath가 no breath 보다는 훨씬 더 좋지 않겠읍니까? ^^

 

좀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오늘은 이만 줄이기로 하구요,

 

다른 질문들이나 얘기들을 또 기대하겠읍니다.

우리 모두 화이팅! 입니다 ~

 

2009.6.25 김진